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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6)


1.3.4. 부르심의 넷째 목적은 합당하게 행하는 것(a worthy walk)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1-3) 

worthy는 ‘훌륭한,’ ‘...에 어울리는’이라는 뜻의 낱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훌륭하고 어울리는 행동을 하기 위해 다음의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겸손(謙遜,humility)과 온유(溫柔, gentleness), 그리고 오래 참음(patience)이라는 덕으로 용납(관용, tolerance)을 보여주라고 합니다. 물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위한 용납입니다. 그리고 평안(peace)의 끈(매는 줄, bond) 안에서 성령의 하나됨(unity)을 지키기 위해 힘쓰라고 합니다.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시고 힘쓰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겸손합니까? 설령 잘하는 것이 있더라도 자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높게 생각하는 그런 겸손을 지니고 있습니까? 온유합니까? 온유는 마음이 부드럽고 행동이 친절함을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해 하는 자세, 곧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며 주께 순종하는 자세로 이웃을 대하는 마음가짐, 혹은 고통이나 억울함 심지어 굴욕 속에도 내면적으로 부드러운 심령을 견지하고 겸손히 참아내는 고상한 인격을 뜻합니다(민 12:3; 시 25:9)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마 5:5) 

내 안에 이런 온유라는 덕이 있는지요? 나는 오래 참습니까? ‘오래 참음(patience)’은 ‘좋지 않은 일 등을 겪다(undergo),’ ‘고통받다(suffer),’ ‘참다, 견디다(bear)’ 등의 뜻인 pati의 라틴어 현재분사형 patiens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가끔 이런 우스개소리를 듣습니다. 학생이 숙제를 계속해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나는 오래 참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바로 접니다. 또 다른 우스개소리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6,000년을 참고 기다리셨다. 나는 엿새, 아니 6분이라도 참을 수 있는가?’ 나에게는 이런 오래 참음의 덕목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덕목인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합니다. 그런 덕목들로 용납하는 것이,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량을 베푸는 것이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며, 훌륭히 행하는 것이며, 어울리게 행하는 것(a worthy walk)입니다. 오래 참지 못하면 아량을 베풀 수 없습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금방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으면 관용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과 온유까지 겸비해서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간단치 않습니다. 은근히 자랑이 튀어나올 수도 있습니다.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로 가면을 쓸 수도 있습니다. 정말 그런 마음으로 합당하게 행할 수 있을까요? 그렇군요. 성령께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과 평안, 이 모든 것들을 성령께서 하나로 묶어서 합당한 행동을 하게 하십니다. 다 아시다시피, 나는 겸손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겸손이 아닙니다. 한꺼풀 벗겨보면 교만과 건방짐이 금방 드러납니다. 온유한 마음은 저 멀리 외출중입니다. 참을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랑?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 평안이 있을리가 없지요.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나에게도 그런 덕목에 대한 소망이 있는 한, 미쁘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이 모든 부덕을 덕으로 바꾸어주실 겁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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