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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3)


1.3. 다음은 NASB에 있는 각주의 내용을 참고한 것입니다. 서신서에 항상 나타나듯이, 부르심을 받는다는 말은 구원으로의 일반적인 초대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고 선택적인 부르심을 일컫는 말입니다. 관련구절을 찾아봅니다. 관련구절에 대한 글은 단순한 저의 생각임을 다시 밝힙니다. 이 글의 초반에 이것저것 쓸 말이 많군요. 참고해야 할 것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롬 1:7)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는 자들이입니다. 성도(聖徒, saints, holy people)란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요? 라이프성경사전의 도움을 받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속된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 일원으로 부름받은 자들을 일컫습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가리켰는데, ‘구분된 자,’ ‘성별된 자,’ ‘거룩한 자’란 뜻의 ‘카도쉬’로 불렸습니다(대하 6:41; 시 16:3).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하기오스’라는 헬라어로 바꾸어 사용했는데, 이것 역시도 ‘거룩하다’는 뜻으로서, 거의 대부분 ‘성도’를 지칭했습니다. 결국 성도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가 된 모든 거룩한 자들을 말합니다(시 106:16; 벧전 2:5).

이 성도들은 온전히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행 9:13; 고전 16:1; 고후 1:1). 이외에도 성도를 가리키는 말로는 믿는 자(행 5: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롬 1:7), 형제(마 23:8),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마 5:45),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롬 9:26), 약속의 자녀(롬 9:8), 빛의 자녀들(눅 16:8), 택하신 족속(벧전 2:9), 택한 그릇(행 9:15), 하나님의 상속자(롬 8:17), 거룩한 백성(사 62:12), 거룩한 제사장(벧전 2:5), 그리스도인(행 11:26; 26:28) 등이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무가 따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고(시 30:4), 여호와를 사랑하고(시 31:23), 여호와를 경외하고(시 34:9), 여호와를 의뢰하고(시 37:3, 5), 여호와 앞에서 기뻐하고(시 37:4), 형제를 섬기고(고후 9:1), 봉사하고(고후 9:12), 전도하고(엡 3:8),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동하고(엡 4:1),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엡 6:18),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고(유 3), 불평과 투기를 버려야 하고(시 37:1), 분과 노를 버려야 하고(시 37:8), 악을 멀리하고(시 97:10), 그리고 세상을 판단하는 것(고전 6:1-2) 등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2-24)


Nicodemus (left) talking to Jesus, by Henry Ossawa Tanner

부르심을 받은 자들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유대인과 헬라인을 들었습니다. 유대인은 위 라이프성경사전에 나와 있듯이 선민으로 부름받았다는 자부심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종교적인 표적(sign)을 구했던 모양입니다. 바리새인(Pharisee)인 니고데모(Nicodemus)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는 말에도 그런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1-2) 

이렇듯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또한 헬라인은 철학의 본고장처럼 지혜를 찾았던 모양입니다. 그리스라고 하면 먼저 떠오른 것이 철학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종교든지 철학이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이며, 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입니다. 그 그리스도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성도라는 것이지요.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4)

그렇게 부르시는 분은 미쁘십니다(faithful). ‘미쁘다’라는 말은 ‘믿음직하다,’ ‘확실하다(sure),’ 또는 ‘미덥다(reliable)’라는 뜻의 낱말입니다. 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과 관련하여 언약을 끝까지 지키고 이루시는 신실한 분임을 강조하는 말로 종종 사용됩니다(행 13:34; 고후 1:18; 살전 5:24; 딤후 2:11; 히 10:23). 신실한 분이시니, 그분께서 이루실 겁니다. 그 신실하신 분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 2:13-14)

부른다는 것은 택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택해야지 부르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 구절을 살펴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언제 선택하셨다고 합니까? 처음부터(첫 열매, first fruits, 살후 2:13) 택하셨습니다. 창세 전에(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엡 1:4)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살후 2:13)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살후 2:13)과 진리를 믿음으로(살후 2:13) 이루어집니다. 이 구원을 위하여 우리를 부른다고 합니다(살후 2:14). 매개체는 복음입니다(살후 2:14). 그리고 그 부르심의 목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살후 2:14).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항상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살후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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