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칩시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각계각층의 나머지 지도자들은 임금님의 사자들(messengers)을 잡아 욕을 보이고 죽입니다. 이건 신앙을 떠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너무한 일입니다. 아무리 임금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한 일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비유에 과장법이 많이 들어있지만, 임금님의 사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은 너무 심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가 바리새인들이 들으라고 하신 비유이지만, 저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을 핍박하거나, 이런저런 핑계로 그 부르심에 반응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부르심에 응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건 너무 심합니다. 쿠데타입니다. 반역입니다. 반란입니다.
여러분이 임금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쿠데타를 그냥 두겠습니까? 임금님과 왕자를 무시하는 것도 참을 수 없는데, 잔치에 오라고 부르런 간 사자들까지 죽이다니요? 그래서 임금님은 철저한 응징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자들을 다시 보냅니다. 그만큼 왕자의 혼인 잔치는 중요합니다. 이제는 지도자층을 부르지 않습니다. 왕궁 밖에 나가 아무나 불러들입니다. 만나는 대로 초대합니다. 닥치는 대로 초청합니다. 그렇게 해서 왕궁의 혼인 잔치 자리는 채워집니다.
1.6.2. 예수님의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임금님이 잔치 자리에 와서 보니, 한 사람이 예복(wedding clothes)을 입지 않은 채로 앉아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예복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아무나 초청해 놓고 갑자기 예복이라니? 사자들이 길에서 만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초청한 사람들에게 예복이 있을리가 있나? 임금님이나 왕자님만 예복을 입으면 됐지, 나까지 예복을 입을 필요가 있는가? 그저 좀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평소에 아무렇게나(?) 옷을 입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Jan Luyken: the man without a wedding garment, Bowyer Bible.
그런데 상황에 맞는 옷이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페라를 관람할 때 입는 옷, 소풍갈 때 입는 옷, 운동할 때 입는 옷, 등산할 때 입는 옷(어떤 분은 동네 뒷 언덕에 올라가는데 거의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할 기세의 등산복을 입습니다), 학교갈 때 입는 옷, 장례식장에 갈 때 입는 옷, 예수님의 이 비유처럼 결혼식장에 갈 때 입는 옷 등등 말입니다. 심지어 고기집에 가서도 옷은 아니지만 앞치마를 두르고 고기를 굽기도 합니다. 아, 파티에 갈 때 입는 옷도 있군요. 서양영화를 보면 십대의 딸이 파티에 갈 옷을 고르느라 이것저것 입어보는 장면이 흔합니다. 우리나라의 사극에서도 왕을 배알할 때 입는 옷이 있습니다. 관주를 보니 요한계시록으로 가보라고 하는군요.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6-8)
예복은 세마포 옷(fine linen)입니다. 세마포(細麻布)는 아마포(亞麻布)라고도 하는데, 아마는 중·근동에서 많이 자생하는데 이집트의 세마포는 품질이 우수하기로 유명하다고 합니다(출 35:25; 수 2:6). 제사장, 레위인, 귀인들의 의복 재료, 성전의 휘장, 시신을 싸는 수의 재료로 이용되었습니다(출 28:5-42; 삼하 6:14; 대하 3:14; 5:12; 마 27:59). 한편 세미하게 직조된 세마포는 부의 상징이요(눅 16:19), 또 위의 구절과 같이 성도의 영적 순결과 거룩한 행실을 상징합니다(계 19:8, 14).
계시록 19장 8절의 세마포 옷은 빛나고 깨끗한(bright and clean [NIV], clean and white [KJV]) 옷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런 깨끗한 옷일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옳은 행실(the righteous acts(deeds) of the saints)을 나타냅니다. 그 옳은 행실이라는 옷을 입지 않고 잔치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임금님이 “친구, 자네는 예복도 없이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나?”라고 묻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또는 임금님의 그 꾸중이 너무 무서워서 대답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말을 못하니까 그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만약 그가 “임금님, 실은 여차여차해서 예복을 준비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왕자님의 혼인 잔치에 꼭 있고 싶습니다. 예복을 준비하지 못해 죄송하지만 용서해 주십시오. 저도 왕자님의 혼인을 축하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계속 상상해봅니다. 임금님은 “사환, 예복을 모아둔 방에 가서 이 친구―임금님은 이 사람을 시종일관 ‘친구(friend)’라고 부릅니다―에게 맞는 예복 한 벌을 가지고 오게. 그리고 이 친구에게 입히게. 이 친구도 이왕 왔으니, 왕자의 혼인을 축하하고 잔치를 마음껏 누리게 하게.”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저의 상상이지만, 임금님은 용서하시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힐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결정적인 말씀으로 비유를 마무리하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For many are invited(called [KJV]), but few are chosen.) (마 22:14)
하나님께서 부르시더라도,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택함을 입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부르소서. 하나님의 부름심을 듣는 귀를 열어주소서. 부름심을 듣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선택되기를 바랍니다. 옳은 행실의 밝고 순수한(bright and pure[ESV]) 옷을 입고 싶습니다.
다음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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