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유다서(12)


1.6.1.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칩시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각계각층의 나머지 지도자들은 임금님의 사자들(messengers)을 잡아 욕을 보이고 죽입니다. 이건 신앙을 떠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너무한 일입니다. 아무리 임금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한 일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비유에 과장법이 많이 들어있지만, 임금님의 사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은 너무 심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가 바리새인들이 들으라고 하신 비유이지만, 저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을 핍박하거나, 이런저런 핑계로 그 부르심에 반응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부르심에 응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건 너무 심합니다. 쿠데타입니다. 반역입니다. 반란입니다. 

여러분이 임금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쿠데타를 그냥 두겠습니까? 임금님과 왕자를 무시하는 것도 참을 수 없는데, 잔치에 오라고 부르런 간 사자들까지 죽이다니요? 그래서 임금님은 철저한 응징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자들을 다시 보냅니다. 그만큼 왕자의 혼인 잔치는 중요합니다. 이제는 지도자층을 부르지 않습니다. 왕궁 밖에 나가 아무나 불러들입니다. 만나는 대로 초대합니다. 닥치는 대로 초청합니다. 그렇게 해서 왕궁의 혼인 잔치 자리는 채워집니다. 

1.6.2. 예수님의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임금님이 잔치 자리에 와서 보니, 한 사람이 예복(wedding clothes)을 입지 않은 채로 앉아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예복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아무나 초청해 놓고 갑자기 예복이라니? 사자들이 길에서 만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초청한 사람들에게 예복이 있을리가 있나? 임금님이나 왕자님만 예복을 입으면 됐지, 나까지 예복을 입을 필요가 있는가? 그저 좀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평소에 아무렇게나(?) 옷을 입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Jan Luyken: the man without a wedding garment, Bowyer Bible.

그런데 상황에 맞는 옷이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페라를 관람할 때 입는 옷, 소풍갈 때 입는 옷, 운동할 때 입는 옷, 등산할 때 입는 옷(어떤 분은 동네 뒷 언덕에 올라가는데 거의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할 기세의 등산복을 입습니다), 학교갈 때 입는 옷, 장례식장에 갈 때 입는 옷, 예수님의 이 비유처럼 결혼식장에 갈 때 입는 옷 등등 말입니다. 심지어 고기집에 가서도 옷은 아니지만 앞치마를 두르고 고기를 굽기도 합니다. 아, 파티에 갈 때 입는 옷도 있군요. 서양영화를 보면 십대의 딸이 파티에 갈 옷을 고르느라 이것저것 입어보는 장면이 흔합니다. 우리나라의 사극에서도 왕을 배알할 때 입는 옷이 있습니다. 관주를 보니 요한계시록으로 가보라고 하는군요.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6-8)

예복은 세마포 옷(fine linen)입니다. 세마포(細麻布)는 아마포(亞麻布)라고도 하는데, 아마는 중·근동에서 많이 자생하는데 이집트의 세마포는 품질이 우수하기로 유명하다고 합니다(출 35:25; 수 2:6). 제사장, 레위인, 귀인들의 의복 재료, 성전의 휘장, 시신을 싸는 수의 재료로 이용되었습니다(출 28:5-42; 삼하 6:14; 대하 3:14; 5:12; 마 27:59). 한편 세미하게 직조된 세마포는 부의 상징이요(눅 16:19), 또 위의 구절과 같이 성도의 영적 순결과 거룩한 행실을 상징합니다(계 19:8, 14). 

계시록 19장 8절의 세마포 옷은 빛나고 깨끗한(bright and clean [NIV], clean and white [KJV]) 옷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런 깨끗한 옷일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옳은 행실(the righteous acts(deeds) of the saints)을 나타냅니다. 그 옳은 행실이라는 옷을 입지 않고 잔치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임금님이 “친구, 자네는 예복도 없이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나?”라고 묻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또는 임금님의 그 꾸중이 너무 무서워서 대답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말을 못하니까 그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만약 그가 “임금님, 실은 여차여차해서 예복을 준비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왕자님의 혼인 잔치에 꼭 있고 싶습니다. 예복을 준비하지 못해 죄송하지만 용서해 주십시오. 저도 왕자님의 혼인을 축하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계속 상상해봅니다. 임금님은 “사환, 예복을 모아둔 방에 가서 이 친구―임금님은 이 사람을 시종일관 ‘친구(friend)’라고 부릅니다―에게 맞는 예복 한 벌을 가지고 오게. 그리고 이 친구에게 입히게. 이 친구도 이왕 왔으니, 왕자의 혼인을 축하하고 잔치를 마음껏 누리게 하게.”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저의 상상이지만, 임금님은 용서하시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힐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결정적인 말씀으로 비유를 마무리하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For many are invited(called [KJV]), but few are chosen.) (마 22:14)

하나님께서 부르시더라도,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택함을 입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부르소서. 하나님의 부름심을 듣는 귀를 열어주소서. 부름심을 듣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선택되기를 바랍니다. 옳은 행실의 밝고 순수한(bright and pure[ESV]) 옷을 입고 싶습니다.  

다음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유다서(102)

18.4.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조롱하는 내용이 이렇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3-7) 역시 개역 개정판은 점잖게 옮겼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약속을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으냐?" (벧후 3:4, 공동번역)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동번역이 경박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 공동번역의 구절을 빈정대는 감정으로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경위를 압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에서 셋째 날의 창조 기록(창 1:9-13, 벧후 3:5)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Noah)때의 홍수 심판 사건(창 6:5-8:14)을 압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方舟, ark)를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방주의 히브리어 ‘테바’는 원래 ‘상자,’ ‘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노아의 방주(창 6:14) 외에 모세가 나일 강물에 버려질 때 담겨진 ‘갈대 상자’를 뜻하기도 합니다(출 2:3, 5). 그리고 헬라어 ‘키보토스’는 ‘나무로 된 상자’(a wooden box), ‘궤’라는 뜻으로, 방주(마 24:38; 히 11:7; 벧전 3:20) 외에 언약궤(히 9:4; 계 11:19)를 일컫기도 합니다. 방주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홍수를 피...

유다서(66)

11.3.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 거짓 선생들은 삯, 그것도 불의의 삯을 위하여 발람(Balaam)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습니다. 짝이 되는 베드로 사도의 편지의 한 부분을 봅시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벧후 2:15-16) 유다서 11절의 발람의 이야기로 갑니다. 민수기 22장에서 24장에 발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Moab) 평지에 진을 치고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Jericho) 맞은 편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모압 왕은 십볼(Zippor)의 아들 발락(Balak)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해 달라고 브올(Beor)의 아들 발람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물론 복채를 주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과 함께 하지도 말고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신들이 이 소식을 모압 왕에게 전하자, 그는 첫 번째 사신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에게 가되 하나님이 이르시는 말씀만 준행하라고 반쯤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든 것을 보고 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발람이 나귀에게 채찍질합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서 사람의 말을 하게 하십니다. 왜 때리느냐고 추궁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혀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에게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도록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도착하자 발락은 융숭한 대접을 합니다.  Balaam and the Ass. by Rembrand...

유다서(23)

3.5. 모세와 불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쓴 <유대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모세가 에디오피아인들과 싸운 경위의 일부분을 옮깁니다.  모세가 이집트의 왕궁에서 왕자로 있었을 때 에디오피아인들이 이집트를 침략해서 이집트인들의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에 이집트인들은 모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집트의 서기관들은 모세의 용맹으로 적을 물리칠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모세가 전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기뻐했으나, 히브리인들의 서기관들은 장차 모세가 그들의 장군이 되면 이집트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 모세는 적들이 그의 공격을 알아차리기 전에 군대를 거느리고 적들을 저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수로가 아니라 육로로 행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육로로 행군하면서 그의 지혜가 매우 뛰어남을 실증해 보여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뱀이 많았기 때문에 (이곳 뱀은 다른 지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번식력이 뛰어나며 독성이 특히 강한 데다 보기에도 유달리 흉측해 보였습니다. 어떤 뱀은 눈에 띄지 않게 땅에 숨어 있다가 솟아 올라 공중을 날아 부지중에 사람을 덮쳐 해를 가하기도 했습니다). 육로로 통과하기가 어려운데, 모세는 군대가 해를 입지 않도록 무사하게 보호하는 멋진 계책을 창안해 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사초(sedge)로 방주 모양의 바구니를 만들고 그 속에 이베스(ibes)라는 새들을 담아 들고 갔습니다. 이 새는 뱀들에게는 최대의 천적인데, 이 새들이 접근하면 뱀들은 도망을 쳤습니다. 뱀들은 도망을 치다가 이베스에 의해 잡혀 먹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베스는 길들여진 동물이며 단지 뱀 종류에게만 해를 끼쳤습니다. 모세는 이런 뱀들이 서식하는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이베스를 풀어 놓아 뱀들을 물리쳤고 군대가 그 지역을 통과할 때까지 이베스를 이용했습니다. 결국 모세는 이렇게 행군을 거듭해 에디오피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