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이런 부르심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첫째, 그리스도와의 교제(fellowship with Christ)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9)
여러분은 어느 경우에 누군가를 부릅니까? 그리고 어느 경우에 부름을 받습니까? 상대방을 부르고 또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나와 상대방의 교제를 낳습니다. 교제할 때 나는 상대방에게 미쁩니까? 상대방은 나에게 미쁩니까?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4)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 1:3)
내가 성도를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감(사귐, fellowship)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심심해서가 아니라 그와의 사귐과 그 사귐의 누림을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은 우리를 부르는 목적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사귀고 교제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연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을 불러 사귀고 교제를 나누는 것도 황홀할 터인데, 하물며 상천하지에 유일하신 전능자와 사귀고 그 교제를 누리는 것이 어떠할까 짐작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부르시는 하나님은 분명 미쁘심에(faithful) 틀림없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1.3.2. 부르심의 둘째 목적은 화평(peace)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 7:15b)
하나님께서 화평 중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화평 안에서 살도록(to live in peace) 하기 위함입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를 보면 싸우기 위해 상대방을 부르는 경우를 봅니다. 서로의 신념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면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화평은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 그런 상황에서 살라고 것이 아닙니다. 남을 짓밟아야지 직성이 풀리는 그런 환경에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부른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부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존재입니다. 죄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뛰어 넘으셔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것도 화평 중에 부르십니다. 부르는 목적은 화평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이 없다면 우리를 부르실까요? 책망하고 벌을 주시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의 화평을 회복하시기 위해 부르십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부르는 목적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비록 껄끄러운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부르는 목적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일 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화평이 아니라면 굳이 상대방을 부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화평을 추구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Mercy & Truth are shown together in a 13th-century representation of Psalms 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시 8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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