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부르고 부름을 받는 관계… 우리는 성경에서 귀신들린 자(엄밀히 말하자면, 귀신)가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이 나(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우리)를 멸하려 오셨습니까? 나(우리)를 괴롭게 하지 마시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분입니다(마 8:29; 막 1:24; 5:6-8; 눅4:33-34; 8:28).”라고 말하는 장면을 봅니다. 귀신의 이런 말에서 두어 가지를 생각해봅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귀신 같이 압니다. 귀신도 아는 예수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까? 굳이 베드로의 고백(마 16:16; 막 8:29; 요 11:27)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까?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는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예수가 누구야?”라고 물을 때, 베드로의 고백을 되뇌이는 것 말고, 내가 아는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저의 경건이 모자라고 믿음이 어리다는 반증이겠지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b)
혈육이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 교사들에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 즉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혈육을 통해, 주일학교 선생님들을 통해, 성경 교사들을 통해 알게 해주셨습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분들의 가르침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사용하셨다는 말입니다. 절대적인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통해 알게 해주셨습니다. 한꺼번에 다 알지는 못할지라도 조금씩 조금씩 알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귀신들이 하는 말을 잘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괴롭게 하고 자기들을 멸하려 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그런데 나는 어리석고 아둔해서, 생명을 얻게 하려고 그것도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나와 상관이 없는 분으로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괴롭게 하고 나를 멸하려 오셨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말입니다. 좁고 좁은 나의 생각으로, 희미하고 희미한 나의 자존심 때문에, 어설프고 어설픈 나의 지식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곡해하고 왜곡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마 8:29, 공동번역)?”라고 나를 간섭하지 말라고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냥 나를 내버려두라고 투정부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왜 나를 못살게 구느냐고 원망한 적도 많습니다. 상천하지에 홀로 주재이신 하나님을 잘못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간장종지만큼이나마 알 듯도 합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1.9. 1절부터 생각할 것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친동생이자 초대 교회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의 겸손을 보았습니다. 목에 힘을 주고, 또 어떤 면에서는 그런 대접을 받을 만도 한데, 겸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자신을 부릅니다. 그리고 부르심… 부르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보전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부르신 자를 끝까지 안전하게 지키십니다. 유다는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자에게 편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의 수신인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또는 어떤 상황에 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편지의 내용으로 그들의 상황을 유추할 수 밖에 없군요. 수신인이 누구인지 살피기 전에 인사말의 후반부인 2절을 봅시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