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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6)


2.3. 내친 김에 비슷한 뜻의 자비(慈悲, mercy, kindness)도 찾아보았습니다. 깊이 동정하며 불쌍히 여김(눅 6:36; 약 5:11)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이 진노를 그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것(느 9:17; 딛 3:4-7), 원수나 이방인을 적대시하지 않고 관용을 베푸는 것(레 19:34; 눅 6:34-35),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약자 또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심이나 그들을 도와주려는 긍휼의 마음(욥 6:14; 시 5:8; 25:6; 잠 14:21), 슬픔이나 부족을 위로하는 친절(빌 2:1), 이웃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출 22:27; 눅 6:36; 약 5:11).

한편, ‘자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으로서(신 4:31; 히 2:17; 마 5:43-48; 벧전 1:3-5), 풍부하며(느 9:17; 사 63:7), 차별이 없고(눅 6:35), 인간의 범죄에 구애받지 않고(시 78:38; 86:5, 15; 행 26:16-18), 영원합니다(대상 16:41; 사 54:8). 하나님은 이 자비에 기초하여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구원하십니다(시 103:4; 애 3:22; 욜 2:13; 미 7:18; 딛 3:5). 따라서 자비는 하나님의 사람들 곧 참된 그리스도인의 품성이어야 하며(눅 6:36; 약 2:1-13),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갈 5:22-23).

2.4. 그럼 라이프성경사전은 은혜(恩惠, grace)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기쁨이나 상냥함, 사랑스러움’ 혹은 ‘호의나 친절, 자비, 긍휼’ 그리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이나 사랑’ 등을 의미합니다. 그중에서도 성경은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창 6:8), 특별히 아무런 조건 없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초월한 사랑이라는 뜻으로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의 최고봉입니다. 이 은혜는 분명 죄인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통로와 수단이자 성도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입니다(엡 2:5; 딛 2:11).

그리고 이 은혜야말로 성도로 하여금 경건과 거룩한 삶을 유지하게 하는 지속적인 힘이 되며(행 11:23; 20:32; 고후 9:14), 구원의 보증이 됩니다(고후 1:5). 그리고 이 은혜는 하나님의 뜻대로 주시며(출 33:19), 때를 따라 주시고(사 49:8; 고후 6:2; 히 4:16), 쌓아두고 주시며(시 31:19), 또한 풍성하게 주십니다(엡 1:7). 이 은혜는 택한 백성에게 약속되어진 것으로(사 30:18; 60:10)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출 20:6), 정직하고(잠 14:9), 겸손하며(잠 3:34; 약 4:6; 벧전 5:5), 긍휼을 바라며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주시기로 약속되었습니다(롬 5:20; 히 4:16).

전문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지 않아서인지 뚜렷한 차이를 알기가 어렵군요. 그러나 어떤 낱말이든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것도 불같은 사랑을 나타내는 낱말들입니다. 평강과 사랑에 대한 설명도 찾아볼까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낱말들인데, 이왕이면 뜻을 정확하게 알고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5. 라이프성경사전은 평강(平康, peace)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모든 것이 원만하여 마음에 걱정이 없는 상태입니다. 성경에서는 ‘평안,’ ‘평화’로도 번역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근원은 하나님(민 6:26; 빌 4:7), 그리스도(눅 24:36; 요 14:17), 성령(엡 4:3)이시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평강의 복을 허락하시고(욥 25:2; 시 29:11), 또 평강을 상실한 자를 치료하시며(렘 33:6),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늘 평안케 해주십니다(빌 4:7).

‘평안’을 뜻하는 히브리어 ‘솰롬’의 사용 범위는 폭 넓은데 국가 사이의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삿 8:9; 삼상 7:14; 왕상 22:27-28; 왕하 9:17; 대하 14:6), 가정에서 불화가 없는 행복한 상태나 가난과 궁핍 등 경제적 고통에서 자유로운 상태(시 147:14) 등으로 다양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런 평안을 갈망하였고, 그런 맥락에서 ‘솰롬’을 일상적인 인사말로 사용하였습니다(창 29:6; 삼상 25:6; 왕하 4:26; 눅 10:5-6; 벧전 1:2). 이 평안은 점점 승화되어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을 가리키는 말로 발전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궁극적으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사 9:6)를 통해 죄사함을 얻은 자가 누리는 심령의 평안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요 14:27; 롬 5:1). 즉, 참 평안은 평안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내주(內住)와 관련이 있는 것이요, 그분이 십자가 희생을 통해 이루신 구원으로 가능합니다(눅 7:50; 요 14:27; 16:33; 20:20-21). 특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가능합니다(롬 5:1).

그리고 이 평안은 하나님의 진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종말론적인 평화까지도 함축하고 있습니다(히 10:19-22; 계 21:1-5; 22:1-5). 한편, ‘평안’과 관련된 표현들을 살펴보면, ‘평안을 주다’는 ‘전쟁이 그치다’(대하 14:6), ‘평안한 곳을 얻다’는 ‘안식처(거처)를 마련하다’(대하 6:31), ‘평안한 백성’은 ‘싸워서 능히 물리칠 수 있는 만만한 만족’(삿 18:10)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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