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유다서(61)


2. 거짓 선생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11-13)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유 11)

11.1. 거짓 선생들, 즉 믿지 아니하는 자들(유 5),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자들(유 6),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거주민처럼 다른 육체를 따라가는 자들(유 7)에게는 화가 미칩니다. 육체를 더럽히고,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유 8) 세 가지로 화를 면할 수 없습니다. 이 3이라는 숫자가 유다서에 계속 흐르고 있군요. 1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유다는 세 가지를 예로 들면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화(woe)라는 낱말을 라이프성경사전에서 찾아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을 경고하시면서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일곱 차례에 걸쳐 ‘화 있을진저’라고 강하게 꾸중하셨다 하여 ‘7화’(七禍)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군요. 형벌을 면치 못할 종교 지도자들의 7가지 죄악을 살펴봅니다(마 23장).

James Tissot, 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Brooklyn Museum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15)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마 23:16-22)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마 23:23-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 23:25-2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7-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마 23:29-36)

좀 길지만 다 옮겨 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서슬 시퍼런 칼날이 드러남을 느끼지 않습니까?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는 어떤가요? 사람들 앞에서 천국 문을 닫고, 나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지는 않습니까? 구원 받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습니까?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논리로 상한 심령을 가진 자들을 방해하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온 사람을 지옥 자식으로 만들지는 않습니까? 소위 말하는 초신자에게 엉뚱한 말을 해서 교회로 오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않습니까? 

제단이 큽니까 아니면 예물이 큽니까? 성전이 큽니까 아니면 그 성전 안에 계시는 분이 큽니까? 하늘이 큽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이 큽니까? 더 큰 것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작은 것에는 목숨을 걸면서 더 크고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소홀히 하지는 않습니까? 특히 이 부분에서 저는 가끔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과 구원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 나름대로 만든 또 다른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말입니다. 그래서 더 크고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한 채로 아주 작고 지엽적인 것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한참 이야기한 후에 “이건 구원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고…”라고 하면서 얼버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나의 모습도 봅니다. 다른 이들은 나를 칭찬하지만, 그 칭찬을 듣는 나는 부끄럽고 민망해서 쥐구멍을 찾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경건한 사람들 앞에 가는 것을 무서워 할까요? 나의 더러운 것이 드러날까봐 말입니다. 경건한 성도들을 박해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방해하지는 않습니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냥 그대로 놓아두면 가장 소극적이고 최소한의 사랑을 실천하기라도 할텐데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예수님의 경고처럼 유다도 화를 경고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서 외식(外飾, hypocrisy)의 설명을 한 번 보겠습니다. 역시 라이프성경사전의 도움을 받습니다. ‘휘포크리노마이’(···인 체하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원래 가면을 쓰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즉 연극 배우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성경에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거짓으로 행동하는 것, 곧 종교적(도덕적) 가식(假飾)이나 위선(僞善)을 뜻합니다(마 6:5; 23:27; 눅 6:42; 갈 2:13). 예수께서 특별히 이 외식하는 자에 대해 책망하셨는데, 구제(마 6:2), 기도(마 6:5; 막 12:40), 금식(마 6:16), 판단이나 비판(마 7:5), 부모 공경(마 15:5-7),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거나(마 15:8), 율법을 준수하는 일(마 23:23)에서 표리부동(表裏不同)함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처럼 외식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눈을 먼저 의식하기 때문이며(마 6:4-6, 18; 23:28), 타인으로부터 영광과 칭찬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고(마 6:2; 23:5, 7),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이며(마 15:7-8), 간사함과 악함과 불의가 충만하기 때문이고(마 22:18; 23:25, 28), 믿음을 배반했기 때문이입니다(딤전 4:1-2). 이처럼 외식하는 자들은 그 하는 일에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서 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마 6:2, 5). 외식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을 의식하며, 은밀히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합니다(마 6:6, 18).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유다서(102)

18.4.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조롱하는 내용이 이렇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3-7) 역시 개역 개정판은 점잖게 옮겼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약속을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으냐?" (벧후 3:4, 공동번역)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동번역이 경박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 공동번역의 구절을 빈정대는 감정으로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경위를 압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에서 셋째 날의 창조 기록(창 1:9-13, 벧후 3:5)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Noah)때의 홍수 심판 사건(창 6:5-8:14)을 압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方舟, ark)를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방주의 히브리어 ‘테바’는 원래 ‘상자,’ ‘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노아의 방주(창 6:14) 외에 모세가 나일 강물에 버려질 때 담겨진 ‘갈대 상자’를 뜻하기도 합니다(출 2:3, 5). 그리고 헬라어 ‘키보토스’는 ‘나무로 된 상자’(a wooden box), ‘궤’라는 뜻으로, 방주(마 24:38; 히 11:7; 벧전 3:20) 외에 언약궤(히 9:4; 계 11:19)를 일컫기도 합니다. 방주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홍수를 피...

유다서(101)

18.3.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도 모욕과 희롱은 계속됩니다. Crucifixion, from the Buhl Altarpiece, a particularly large Gothic oil on panel painting from the 1490s.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35-44)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홍포를 입힙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가시관을 씌웁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갈대를 쥐게 합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인사를 합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그 왕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뇌이며(마 27:42-43) 희롱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대놓고 조롱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선심쓰는 척하며 이웃에게 조롱의 옷과 가시관과 갈대을 주지는 않습니까? 더 교묘한 방법으로 조롱의 인사, 글자그대로 가시가 돋힌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이웃이 평소에 한 말을 그대로 되뇌면서 조롱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웃의 고통을 같이 느끼지는 못할 망정, 어설픈 나의 잣대로 조롱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웃의 서러움을 공...

유다서(119)

3. 오직 은혜(Sola Gratia):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혀 주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원의 은혜를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며 그것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몇 구절을 찾아봅니다. ‘은혜(헨, hen)’는 ‘호의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이시는 자비, 은혜, 사랑을 말합니다.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창 33:8)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 33:12). Hebrew letters spelling Chesed 또 ‘은혜(헤세드, chesed)’의 기본 의미는 ‘바라다,’ ‘사랑하다’로,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은총이나 자비, 사랑, 긍휼을 말합니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창 21:23)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삼하 2:6)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