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유다서(1)

< 진리 전쟁: 유다서(JUDE) >

위승섭

Papyrus 46, one of the oldest New Testament papyri, showing 2 Cor 11:33-12:9
Papyrus 46, one of the oldest New Testament papyri, showing 2 Cor 11:33-12:9

신약성경의 짧은 책 중의 하나인 유다서에 대한 설교를 들어보지도 못했고, 구절을 인용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습니다. 도대체 유다서는 어떤 책일까라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영성―성경에 영성이라는 낱말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이 뛰어나지도 않은, 아니 경건하지 않은 제가 유다서를 파악한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궁금증이 더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영어성경의 관주와 각주, 그리고 라이프성경사전을 참고하여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적어보자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예, 욕심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참고했지만 저 개인의 생각이 들어가 있음을 밝힙니다. 생각하는 만큼 안다고 했던가요? 일천한 저의 생각이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어지럽히지는 않는지 두려울 뿐입니다. 전문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경건이라는 측면에서도 모자라는 사람이 그냥 느끼고 생각한 대로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것들을 참고하다보니 이야기가 일관성이 없고 여기저기 왔다갔다 할 겁니다. 한가지 더 밝힐 것은 참고 구절을 한 절만 인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맥을 살피기 위해 앞뒤 구절을 다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 하나님께서 저의 생각을 다스려 주시기를 기대하며, 시작합니다. 


Ⅰ. 인사(1-2)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유 1)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 

이 편지를 쓰는 사람은 1절에서 자신을 밝힙니다. 야고보(James; Jacob)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였으며(행15:13-21; 21:18; 갈 2:9), 신약성경의 야고보서를 쓴 사람이었습니다. 이 야고보가 ‘주의 형제’이며(갈 1:19; 마 13:55; 막 6:3), 유다서 1절의 유다는 복음서(마 13:55; 막 6:3)에 나타난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동생’이라고 기록합니다. 유다(Jude, 히브리어 Judah; 헬라어 Judas)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흔한 이름이었지만, 유다서의 저자가 그리스도의 형제인 유다(마 13:55, 막 6:3)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고보의 아들인 사도 유다(눅 6:16; 행 1:16)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비록 저자인 유다가 예수님의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자신을 야고보의 동생으로 소개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형인 야고보의 지도력을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게다가 유다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servant)’라고 밝힙니다. 예수님의 동생이라면 목에 힘을 주고 뻐길 만도 한데, 오히려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여기의 ‘종(servant)’은 ‘노예(slave 또는 bond-servant)’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1장 1절에서 사도 바울(Paul)은 자신을 ‘종(servant)’로 밝혔는데, 이 낱말은 헬라어로 주인에게 속하여 떠날 자유가 없는 노예(slave), 또는 주인을 섬기기로 기꺼이 선택한 ‘종(servant)’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인지 Message와 NLT(New Living Translation)에서는 slave라는 낱말을 사용하고, NASB(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서는 bond-servant라는 낱말을 사용합니다. 나머지 영역본은 servant라는 낱말을 사용하는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기 전까지, 예수님의 동생 유다는 예수님을 메시아(Messiah)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마 13:55; 막 6:3; 요 7:5). 그러나 그 후에 유다는 자신을 예수님의 노예로 겸손히 인정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주님되심(lordship)에 복종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의 친동생마저도 몸과 마음을 낮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하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거 알아?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큰형님이야!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형님이란 말이지. 게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님 있잖아? 그분이 나의 형님이야. 이래도 우리는 뼈대가 있는 가문이라고. 우리가족만큼 신실하고 영적인 가족이 있으면 나와봐! 게다가 우리 어머니 마리아는 말이야, 예수님을 친히 낳으신 분이야.” 이렇게 거들먹거리지 않았습니다.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쥐꼬리만한 세력을 등에 업고 거들먹거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끔 뉴스에 납니다. 술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경찰서에 잡혀가서 도리어 큰소리칩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내 전화 한 통이면 당신네들 다 끝장이야. 옷벗을 각오해.”라고 말이죠.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좀 오래 다녔다고, 목사님과 좀 친하다고, 목사님이 교회의 여러 문제를 나와 의논한다고, 목사님으로부터 직접 양육받았다고, 아무개 장로가 나의 말을 잘 듣는다고, 내가 없으면 교회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성경공부 많이 했다고, 이런저런 세미나와 프로그램에 많이 참석했다고, 전도 많이 한다고, 성경을 일년에 열번 이상 읽는다고, 금식기도를 수차례 한다고, 사흘이 멀다하고 철야기도한다고, 이런 은사를 받았고 저런 기적을 행한다고, 등등... 우리는 어떻습니까? 노예는 커녕 종이라고 자처하는지요? 또는 종이나 노예라고 하면서, 은근히 그 자체를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40일 금식기도를 여러 차례 했다고 명함에까지 새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나 노예라고 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새로운 계급장으로 삼아 스스로 붙이지는 않습니까? 

유다가 자신의 형인 야고보를 언급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언급한 것만 보더라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종(노예)임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유다서(81)

13.2. …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거짓 선생에 대한 유다의 마지막 은유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요즘은 공해 때문에 많은 별들을 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도시에서는 휘황찬란한 인공의 조명 때문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을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깨끗한 공기가 있는 시골이나 또는 광야와 같은 곳에서 찍은 밤하늘의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캄캄한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별들 말입니다. 막 쏟아지려고 하는 그 수많은 별들 말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유성(별똥별이라고 하죠?)이 지나가는 것도 사진에 담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지구뿐만이 아닙니다. 이 지구를 위해 수많은 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창 1:14-19) 큰 광명체는 태양일 것이고, 작은 광명체는 달이겠지요. 그리고 별들을 만드셔서 우주 전체의 별들로 징조(signs)와 계절(seasons)과 날(days)과 해(years)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우주의 나이가 최소한 145억 년이라고 합니다.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다른 천체들이 먼저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지구의 나이는 45~6억 년이라고 합니다. 그에 비해 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의 말씀처럼 지구가 먼저 창조되고 해·달·별 등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다서(66)

11.3.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 거짓 선생들은 삯, 그것도 불의의 삯을 위하여 발람(Balaam)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습니다. 짝이 되는 베드로 사도의 편지의 한 부분을 봅시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벧후 2:15-16) 유다서 11절의 발람의 이야기로 갑니다. 민수기 22장에서 24장에 발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Moab) 평지에 진을 치고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Jericho) 맞은 편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모압 왕은 십볼(Zippor)의 아들 발락(Balak)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해 달라고 브올(Beor)의 아들 발람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물론 복채를 주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과 함께 하지도 말고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신들이 이 소식을 모압 왕에게 전하자, 그는 첫 번째 사신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에게 가되 하나님이 이르시는 말씀만 준행하라고 반쯤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든 것을 보고 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발람이 나귀에게 채찍질합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서 사람의 말을 하게 하십니다. 왜 때리느냐고 추궁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혀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에게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도록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도착하자 발락은 융숭한 대접을 합니다.  Balaam and the Ass. by Rembrandt van Rijn, 16

유다서(102)

18.4.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조롱하는 내용이 이렇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3-7) 역시 개역 개정판은 점잖게 옮겼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약속을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으냐?" (벧후 3:4, 공동번역)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동번역이 경박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 공동번역의 구절을 빈정대는 감정으로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경위를 압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에서 셋째 날의 창조 기록(창 1:9-13, 벧후 3:5)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Noah)때의 홍수 심판 사건(창 6:5-8:14)을 압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方舟, ark)를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방주의 히브리어 ‘테바’는 원래 ‘상자,’ ‘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노아의 방주(창 6:14) 외에 모세가 나일 강물에 버려질 때 담겨진 ‘갈대 상자’를 뜻하기도 합니다(출 2:3, 5). 그리고 헬라어 ‘키보토스’는 ‘나무로 된 상자’(a wooden box), ‘궤’라는 뜻으로, 방주(마 24:38; 히 11:7; 벧전 3:20) 외에 언약궤(히 9:4; 계 11:19)를 일컫기도 합니다. 방주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홍수를 피하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