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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91)


16.2.1. … 불만을 토하는 자며 ...

거짓 선생들은 흠을 잡고 탓하는 자들(불만을 토하는 자들, faultfinders)입니다. 글자그대로 남의 잘못을 용케도 찾아내는 자들입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이해는 못할 망정 남의 잘못을 잘도 들추어 냅니다. 이들은 남의 잘못이나 허물이나 약점을 찾아내는 은사(?)를 받은 모양입니다. 야고보서의 구절을 기억하십니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without finding fault, NIV)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약 1:5-6a)

하나님께서는 나의 잘못이나 허물이나 흠을 찾지 않으십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흠을 찾지 않으시니까, 나는 마음대로 해야지.” 이런 뜻이 아닌 것은 다 이시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사랑으로 그 흠을 덮어주시고,용서하시지만, 흠을 못본체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단지 흠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잘한 것이 있으면 그 잘한 것을 의로 여겨주시지 싶습니다. 나의 흠이 100입니다. 내가 그나마 잘한 것은 10입니다. 단순 수치로 보면 나의 잘못이 10배는 더 크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가중치… 하나님은 잘못 100에 가중치를 두지 않으실 겁니다. 조금이라도 잘한 것에 100배, 1,000배, 10,000배의 가중치를 두실 겁니다. 왜요? 가장 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때문이지요. 그 보혈이 가중치의 역할을 합니다. 

이런 비유가 맞을지 모르겠지만, 벽에 못을 박았다가 빼낸 후 예쁜 벽지를 바르는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벽지를 바른다고 그 구멍난 못자국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덮혀 있을 뿐입니다. 만약 그 벽지를 뜯어내면 못자국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못자국을 보고 지나간 실수와 흠에 대한 반성과 회개를 하고, 앞으로의 새로운 결단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함부로 못질하는 일은 삼가야겠다.”라고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나의 흠을 잡고 탓하지 않으십니다. 

Job and His Friends by Ilya Repin (1869)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사탄은 용케도 나의 흠을 잡고 탓합니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흠을 찾아내어 탓합니다. 마치 욥(Job)의 친구들―데만 사람 엘리바스(Eliphaz the Temanite)와 수아 사람 빌닷(Bildad the Shuhite)과 나아마 사람 소발(Zophar the Naamathite)―처럼 말입니다. 물론 욥의 친구들의 말은 백번 맞는 말입니다. 그들의 신학(?)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욥의 고통과 번민을 얼마나 달래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모든 것을 하루 아침에 다 잃어버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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