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유다서(89)


16.1.2. 다음 원망의 예를 민수기에서 찾아봅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정탐한 다음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민 14:1-5)

The Grapes of Canaan by James Tissot. Although the spies brought back a cluster of grapes so large that it took two men to carry it (Numbers 13:23), only two of the twelve brought back a good report of the land.

우리는 가나안 정탐 이야기를 압니다. 그러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겐 첫 보고였습니다. 비록 눈의 아들 여호수아(Joshua the son of Nun)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Caleb the son of Jephunneh)이 믿음으로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고 외치지만(민 14:6-9), 그들에겐 청천벽력같은 보고였을 겁니다. 우리도 그런 경악스런 소식을 처음 듣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 번 몰아닥친 공포감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갑니다. 그리고 그 공포는 두 스파이를 돌로 쳐 죽이는 지경까지 갑니다(민 14:10).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민 14:10-12)

출애굽기 16장의 원망사건은, 어떤 면에서 보면, 애교(?)로 보아 넘길 수도 있습니다. 배고파서 투덜거리는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출애굽기 1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이시며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민수기에서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항상 그러듯이, 제가 생각한 것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먼저, “어느 때까지(how long)”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표현으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을 밥먹듯이 한 모양입니다. 출애굽한 이후부터 줄기차게,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꾸준히, 반복적으로 원망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어떤가요? 뭔가가 불편해서 처음 한두 번은 원망 아닌 원망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저는 그렇습니다. 뭔가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궁시렁거리면서 불평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습관이 되고 나아가서 나의 성품을 형성합니다. 저도 어지간히 불평하는 편에 속합니다. 

그리고 “멸시하겠느냐(treat me[God] with contempt)?”라는 말씀이 제 귀에 울립니다. 원망하는 것은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일에 대해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은 그 사람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의 지도자에게 원망하는 말과 행동을 하고(민 14:2),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원망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민 14:10)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멸시하는 것(민 14:11)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가 나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면, 나의 마음이 어떨까요? 누군가가 나를 멸시하면, 나의 마음이 어떨까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요?

또한 “믿지 않겠느냐(refuse to believe in me[God])?”라는 질문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원망하는 것은 멸시하는 것이며, 동시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NIV에 따르면 믿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많은 이적을 행해셨음에도 나는 믿기를 거부합니다. 더 이상 무슨 변명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말씀, 즉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민 14:12)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나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멸시하고 믿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대적들]을 쳐서 멸하고 그들[대적들]보다 더 크고 더 강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나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공동체의 지체들을 원망하고 멸시하고 믿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대적들]을 쳐서 멸하고 그들[대적들]보다 더 크고 더 강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물론, 원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갑니다. 출애굽한 1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습니다(민 14:21-38). 그리고 그 사이에 모세의 위대한 탄원이 있습니다(민 14:13-20). 저는 이런저런 어설픈 말로 지면을 가득 메꾸었지만, 사도 바울은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전 10:10)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유다서(102)

18.4.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조롱하는 내용이 이렇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3-7) 역시 개역 개정판은 점잖게 옮겼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약속을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으냐?" (벧후 3:4, 공동번역)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동번역이 경박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 공동번역의 구절을 빈정대는 감정으로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경위를 압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에서 셋째 날의 창조 기록(창 1:9-13, 벧후 3:5)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Noah)때의 홍수 심판 사건(창 6:5-8:14)을 압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方舟, ark)를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방주의 히브리어 ‘테바’는 원래 ‘상자,’ ‘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노아의 방주(창 6:14) 외에 모세가 나일 강물에 버려질 때 담겨진 ‘갈대 상자’를 뜻하기도 합니다(출 2:3, 5). 그리고 헬라어 ‘키보토스’는 ‘나무로 된 상자’(a wooden box), ‘궤’라는 뜻으로, 방주(마 24:38; 히 11:7; 벧전 3:20) 외에 언약궤(히 9:4; 계 11:19)를 일컫기도 합니다. 방주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홍수를 피...

유다서(101)

18.3.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도 모욕과 희롱은 계속됩니다. Crucifixion, from the Buhl Altarpiece, a particularly large Gothic oil on panel painting from the 1490s.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35-44)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홍포를 입힙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가시관을 씌웁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갈대를 쥐게 합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인사를 합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그 왕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뇌이며(마 27:42-43) 희롱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대놓고 조롱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선심쓰는 척하며 이웃에게 조롱의 옷과 가시관과 갈대을 주지는 않습니까? 더 교묘한 방법으로 조롱의 인사, 글자그대로 가시가 돋힌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이웃이 평소에 한 말을 그대로 되뇌면서 조롱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웃의 고통을 같이 느끼지는 못할 망정, 어설픈 나의 잣대로 조롱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웃의 서러움을 공...

유다서(119)

3. 오직 은혜(Sola Gratia):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혀 주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원의 은혜를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며 그것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몇 구절을 찾아봅니다. ‘은혜(헨, hen)’는 ‘호의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이시는 자비, 은혜, 사랑을 말합니다.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창 33:8)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 33:12). Hebrew letters spelling Chesed 또 ‘은혜(헤세드, chesed)’의 기본 의미는 ‘바라다,’ ‘사랑하다’로,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은총이나 자비, 사랑, 긍휼을 말합니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창 21:23)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삼하 2:6)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