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유다서(85)


14.4. 유다서 14절과 15절에 나타난 에녹의 예언에 대해서는 성경이 따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Methuselah)를 낳고(창 5:21),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walked with God, 창 5:22, 24). 상상하시겠습니까? 300년 동안입니다. 나는 30년, 3년, 3개월, 아니 3일 동안이라도 하나님과 동행할까요? 3시간이라도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말 2: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는 것(to do justice)과 인자를 사랑하는 것(to love kindness[또는 steadfast love])과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to walk humbly with your God)입니다. 에녹은 바르게 행동했습니다. 에녹은 공정하게 행동했습니다. 에녹은 인자, 즉 변함없는 사랑(steadfast love)과 자비(mercy)를 사랑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비를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했습니다. 

아픈 이웃들을 돌보아 주었을 것이고, 약한 자들을 보호했을 것이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지 않으셨을 겁니다(창 5:24). 상상해 봅니다. 에녹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아픈 사람을 돌보면서 하나님께 여쭙고 대화했을 겁니다. 그 사람을 낫게 해달라고 말이죠. 나그네를 환대했을 겁니다. 그를 하나님을 맞아들이듯이 환대했을 겁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을 겁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으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죽음을 맛보지 않게 하고 그냥 데려가셨을까요? “에녹아, 올라와서 나와 함께 계속 이야기하자. 나와 함께 있자.”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고, 그는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을까요? 

말라기의 말씀은 레위 자손인 제사장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사장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고, 제사장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화평과 정직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셨습니다. 정의를 실천하고, 인자(자비)를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행하고, 진리를 선포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에게 구하시는 것입니다. 에녹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구절을 더 찾아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 11:5)

Elijah and Enoch - seventeenth-century icon, Historic Museum in Sanok, Poland

히브리서의 유명한 믿음장의 한 구절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by faith)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역사상 두 사람(다른 한 사람은 엘리야, 왕하 2:11)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미가서의 구절을 한 번 더 적겠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유다서(10)

Miraculous catch of fish 1.5.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 누군가가 나를 불러준다는 것은 너무나도 기분 좋은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따뜻한 음성으로 나의 이름을 부릅니다. 내가 고민하고 번민할 때, 어찌 할 바를 몰라 두 손 놓고 멍하니 있을 때, 무서워 발걸음을 뗄 수가 없을 때, 두려워서 무릎이 덜덜 떨릴 때, 간담이 다 녹아내릴 때, 번뇌로 내 가슴이 검은 숯덩이가 되어 정신이 아득할 때, 그 숯덩이가 다 타서 허연 재만 남았을 때,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될 때, 나같은 사람이 살아서 뭘 하겠느냐고 자포자기할 때, 그 어디를 바라보아도 구원의 손길은 다가오지 않을 때,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할 지 전혀 모를 때, 완전한 흑암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내 자신이 나의 존재를 부정할 때, 누군가가 나즈막한 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창조주, 가장 완벽하시고 온전하시고 완전하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그 분의 존재 안에서 격려하시고, 등을 토닥거려 주시고, 얼싸안아 주신다는 것은 더할 나위없이 황홀한 일임에 분명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실패하고, 아니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지만, 더 나아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결국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눅 15:11-32)처럼 실제로 떠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십니다. 나는 나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존재를 인정하십니다. 매일 매순간 나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십니다. 왜 간섭하느냐고 원망 아닌 원망을 할 때도, 죄의 무게에 짓눌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울먹거리며 말할 때도, 하나님은 나를 부르십니다. 나를 인정해 주십니다.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그분께서 “괜찮다.”고 하시면서 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십니다. 좁은 생각이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부르심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

유다서(51)

8.2. … 육체를 더럽히며, ...  육체를 더럽힙니다(defile the flesh[KJV], pollute their own bodies[NIV]). 앞에서 보았지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관계를 맺어 육체를 더럽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거주민들이 다른 신을 따라가며 섬기고 절하면서 육체를 더럽혔습니다. 이단들의 뉴스를 들으면 가끔 그런 뉴스까지 들립니다. 연약한 여인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 것 말입니다. 사회에서 보호받아야 할 가장 약한 자들 중의 하나인 여인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 말입니다. 이단 뿐만 아니라 쥐꼬리만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도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요즘 말로 갑질한다고 하죠. 약자들을 그냥 두어도 모자랄 판에 갑질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9-10)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쓴 편지입니다. 앞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좋겠지만, 최소한 이 구절에 의하면, 음행(sexual immorality), 우상 숭배(idolatry), 간음(adultery), 탐색(male prostitution), 남색(homesexual offend), 도적(thievery), 탐욕(greed), 술취함(drunkenness), 모욕(slander), 속여 빼앗음(사기, swindle) 등은 사악한 것들(불의, wickedness)입니다. 모두 육체를 더럽히는 데 앞장서는 것들입니다. 이런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이러한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위에서 빌 마이어스(...

유다서(9)

1.4.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유다서 1절 하반절에서 유다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밝힙니다. 부르심을 받은자? 누구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일까요? 그리고 그 부른 이는 무엇때문에 불렀을까요?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겁니다. 그리고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뭔가 할 이야기가 있고 시키실 일이 있어서 부르셨을 겁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자는 사랑을 얻은 자입니다. 내가 사랑을 주는 주체가 아닙니다. 나는 사랑을 얻는 입장(beloved)입니다. 어디에서 사랑을 얻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in God the Father)입니다. 저는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하면 저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구절이 바로 그 유명한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이 로마서 8장 28절의 구절이 너무나 아름답게 들리지만, 좁은 저의 생각으로는 동시에 너무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말인데, 과연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가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네 마음(heart)을 다하고 목숨(soul)을 다하고 뜻(mind)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너는 마음(heart)을 다하고 뜻(soul)을 다하고 힘(strength)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다시 말해 너의 모든 것으로, 너의 모든 됨됨이로, 너의 모든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겠지요. 모든 존재는 커녕 일부분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