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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84)


14.3. 창세기 5장에는 아담부터 노아(Noah)까지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녹(Enoch)은 아담의 칠대 손입니다. 계산을 좀 해보았습니다. 에녹이 태어났을 때, 아담은 622세, 셋(Seth)은 492세, 에노스(Enosh)는 387세, 게난(Kenan)은 297세, 마할랄렐(Mahalalel)은 227세, 그리고 야렛(Jared)은 162세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셨을 떼, 아담은 이미 서거했고, 셋은 857세, 에노스는 752세, 게난은 662세, 마할랄렐은 592세, 그리고 야렛은 527세였습니다. 노아가 태어났을 때, 아담과 셋은 이미 서거했고, 에녹은 하늘 나라에 있고, 에노스는 821세, 게난은 731세, 마할랄렐은 661세, 야렛은 596세, 므두셀라(Methuselah)는 369세, 라멕(Lamech)은 182세였습니다. (계산하느라 힘들었습니다. 틀린 계산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아담을 제외한 노아까지의 모든 후손들이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신 사건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족보를 읽으면 지루한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역대상 1장부터 9장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족보와 인물들(발음하기도 힘듭니다)을 읽으려면 보통의 인내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또 상상해봅니다. 아담은 후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었을까요? 가인과 아벨의 슬프고도 슬픈 사건 후,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살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아마도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 자기가 동물들의 이름을 지은 것, 에덴 동산,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등을 후손들에게 전해 주었을 겁니다. 잔치가 있을 때마다, 후손이 태어날 때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의 실수를 이야기했을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는 하나님을 저버리지 말라고 당부했을 겁니다. 비록 아담이 하와와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죄를 범했지만, 그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 영리한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그 수많은 동물들의 이름을 다 지어주었으니까요.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동물의 모습과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해야지 그 동물에 걸맞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겠어요? 저는 아담의 지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첫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지능뿐만 아니라 덕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현대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지만 말이죠. 하여간 그런 높은 덕성을 지닌 아담을 상상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 아담에 비하면 지금의 저를 포함한 현대인은 매우 비참하고 망가진(?) 상태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또 옆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아담은 자기의 모든 삶을 이야기로 후손에게 전했을 겁니다. 나름대로 잘 한 것과 잘못한 것 모두 후손에게 전했을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에덴 동산이 얼마나 멋있는 곳인지, 죄를 어떻게 지었는지, 죄를 지은 결과가 무엇인지, 첫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후 얼마나 자기의 마음이 아팠는지 등등을 모두 말했을 겁니다. 특히 에녹은 아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이 반짝반짝 빛났을 겁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아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담 할아버지의 당부처럼 글자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걸었을 겁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신 후 아담과 함께 거닐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아담 할아버지와 셋 할아버지 그리고 에녹 할아버지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할아버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거의 900년 동안 산 할아버지들(이들이야말로 산 증인, 살아있는 전설(?)입니다)의 이야기 속에서 노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한 세대가 아닌 수 세대를 걸쳐 살아온 할아버지들입니다. 그 숱한 세월을 살아온 할아버지들로부터 무엇을 배웠을까요? 무슨 다짐을 했을까요? 어떤 지혜의 말들을 들었을까요? 가족공동체가 붕괴되고 있는 현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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