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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80)


13.1. …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

거짓 선생들에 대한 다섯 번째 은유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입니다. 관련 구절을 찾아볼까요?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사 57:20) 

바닷가에서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를 본 적이 있습니까? 하얀 거품을 쏟아내며 밀려왔다가 밀려갑니다. 유다는 그 바닷물로 거짓 선생을 빗대어 말합니다. 잔잔한 바다, 강, 호수 등이라 하더라도 물결은 일게 마련입니다. 특히 바닷가에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를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낭만적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손을 잡고 밀려오는 파도를 피해 이리저리 피합니다. 바닷물에 발이 잠기면 꺄르르 웃기도 합니다. 꼬마들은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쌓다가 밀려오는 파도가 다 무너뜨리면 울상을 짓습니다. 노부부는 편한 의자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파도와 바다를 지켜보며 지나온 삶을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파도를 요동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진리에 붙어있지 않고 요동치며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아무리 잔잔한 파도가 친다고 하더라도 거품은 거품입니다. 금방 없어집니다. 철지난 바닷가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한 여름 동안 피서객들이 버리고 간 온갖 쓰레기가 파도에 밀려와 모래사장을 더럽게 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요즘은 해수욕장에서 쓰레기를 빨리빨리 치우니 그런 불쾌한 장면을 보는 것이 흔하지 않습니다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뉴스거리가 되곤 했습니다. 

이사야서의 관련 구절을 보니, 거짓 선생들에 대한 묘사가 적나라합니다. 쓰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짓 선생들은 자랑스럽게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들의 입에는 진흙과 더러운 것이 늘 솟구쳐 올라 그들의 영광이 오히려 그들의 부끄러움을 드러냅니다. 그나마도 수치의 거품처럼 곧 사라지고 맙니다. 그들의 말은 요동하는 바다와 같아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진리에서 벗어나 이리저리 요동치는 바닷물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생각하지 않고 땅의 것만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들의 영향이 그들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해안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입힌다는 것이지요. 관주에 있는 사도 바울의 말도 한 번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고후 4:1-2)

이 구절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이 직분을 맡은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드러내지 못할 창피스러운 일들을 다 버렸으며, 간교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비뚤어지게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밝혀 드러내었으니, 우리는 하느님 앞에나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습니다. (고후 4:1-2, 공동번역)

수치, 즉 부끄러운 일을 숨기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창피스러운 일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위대한 사람이 하는 위대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거침없이 뿜어댑니다. 위대해서가 아님을 짐작하실 겁니다. 거짓 선생들은 수치를 뿜어내는 바다의 거친 물결입니다. 쓰나미처럼 모든 것을 삼킵니다. 그들은 이성이 없기 때문에(유 10), 자기의 수치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수치라는 것을 알면 거침없이 뿜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의 수치가 수치인 줄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수치가 수치인 줄을 아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수치를 수치로 알게 하신 이도 하나님임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나는 수치가 수치인 줄 몰랐을 겁니다. 그리고 나의 부끄럽고 창피한 것을 고백하게 하시고, 덮어주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고 기대합니다.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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