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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75)


12.3. …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

유다의 은유는 계속됩니다. 거짓 선생들은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끄는 자를 목자들(shepherds)이라고 하며, 목자의 임무는 양떼를 알고, 먹이며, 보호함으로써 사심없이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 자들입니다. 양떼가 굶든지, 구덩이에 빠졌든지, 그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안위와 명예만을 골똘히 생각하며 행하는 자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가련한 양떼를 이용하기까지 합니다. 무엇 때문에요?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이지요. 가끔 ‘있는 사람들이 더 해.’라는 말을 듣습니다. 선생이라는 권위의 지위를 이용하여 약한 양떼를 착취한다는 말입니다. 도와주어도 모자랄 판에 약자를 착취합니다. 이들은 이들에게 부여된 권위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 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 (겔 34:8-10)

Allegory of Christ as the Good Shepherd, 3rd century.

베드로전서에 이런 말씀이 있군요.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 5:2-3)

베드로 사도가 장로들(elders)에게 권하는 말입니다. 목자(shepherds)는 양 무리를 치는 자입니다. 억지로 양을 치지 말고(not because you must), 자원함으로 양을 치라고(but because you are willing) 합니다. 마지 못해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일이 아니라(not must)는 말씀이겠지요.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함으로(but willing) 양 무리를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프로그램에 의해 억지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의 이야기입니다. 하기 싫은데 어쩔 수없이 끌려나와(?) 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발을 빼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재주대로 성도들을 섬기고 돌보면 좋겠습니다만, 생활이라는 것이 꼭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하여간, 자원하는 마음으로 양 무리를 돌보는 목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as God wants you to be)입니다. 

그리고 목자는 돈을 탐해서는 안됩니다(not greedy for money). 돈이라는 것이 필요한 물건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에 매여 더러운 이득을 위하면 목자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경고합니다. 오히려 섬기기에 열심을 품으라(기꺼이 맡은 바 본분을 다하라, but eager to serve)고 권합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섬기기를 거부하고 섬김을 받으려고 안달합니다. 그러니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기만 합니다. 양 무리의 본이 되기는 커녕 군림하려고 합니다. 특히 목자들(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이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즉 하나님의 백성 위에 군림할 때, 그 순간부터 그 목자는 목자가 아니라 행정가와 경영자로 변신하는 셈입니다. 단지 목자들 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리더는 섬기는 리더입니다. 나는 섬기는 존재입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섬김을 받으면서 군림하려는 존재입니까? 베드로 사도의 말을 빌리자면, 첫 단추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꺼이 양 무리를 치는 것입니다(벧전 5:2). 그 첫단추부터 다시 잘 채웁시다. 그러면 양 무리의 본이 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벧전 5:4)

목자장(the Chief Shepherd)이 누구입니까?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이십니다(히 13: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한 목자이십니다(요 10: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요 10:11).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섬김의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억지로 양 무리를 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양무리를  친 목자에게,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양 무리를 치지 않고 기꺼이 양 무리를 친 목자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양 무리를 치지 않고 양 무리의 본이 된 목자에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크고 좋은 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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