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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73)


12.2.3. 말로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합니다. 삼국지의 관우를 아실 겁니다. 의형제이며 주군인 유비와 헤어져 한때 조조의 휘하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조조의 대적관계에 있는 원소에게 몸을 의탁한 유비의 소식을 듣고 조조를 떠납니다. 그 유명한 오관참장(五關斬將)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 주인으로 모신 분은 죽어서도 주인으로 모시는 관우입니다. 비록 조조가 유비를 제거하고 관우를 자기의 휘하에 두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 냉철한 조조마저도 관우의 충성과 의리를 높이 사고,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저 또한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순전한 동기로 하나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막 9:24) 도움을 바라며 바울 선생님이 제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딤전 6:2b-12)

바른 말, 즉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않고 다른 것을 따르는 자는 교만합니다. 그 교만한 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합니다. 이런 무지와 변론과 언쟁으로부터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타납니다. 그 결과 그의 마음이 부패해져서 진리를 잃어버립니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경건을 이익의 방도(a means to financial gain)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부자가 되려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에 빠집니다. 그들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다. 이것이 바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는 것이지요. 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the love of money)입니다. 

돈은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돈을 간절히 바라는(탐내는, eager for) 자들은 유혹당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믿음에서 떠나게 되니 많은 근심으로써(with many griefs) 자신을 찌를 수 밖에 없습니다. 시험과 올무와 욕심과 파멸과 멸망을 피하는(flee) 것이 상책입니다. 마치 요셉(Joseph)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피한 것 처럼 말이죠. 음식(먹을 것, food)과 옷(입을 것, clothing)이 있으면 만족의 조건이 충족됩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또는 돈과 하나님을 동급으로 여기는 그 마음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내가 할 일은 의(righteousness)와 경건(godliness)과 믿음(faith)과 사랑(love)과 인내(endurance)와 온유(gentleness)를 계속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덕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딤전 6:12; 유 3)입니다. 그것이 영생을 붙잡는 길입니다. 그 영생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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