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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71)


12.2.1. 그들은 …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 

거짓 선생들은 성도들의 애찬(love feasts)에 암초입니다. ‘암초(hidden reefs)’라는 낱말이 신약성경의 여기에서만 나타난다고 하는군요. 아시다시피 암초는 수면 아래에 잠겨 배를 파괴하는 바위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하심에 감사하는 식사 자리에, 한 마음으로 즐겁게 떡을 떼는 식사 자리에, 서로를 권면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리는 식사 자리에, 이들은 물 밑에 감추어진 암초처럼 자리잡고 앉아 있습니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으니, 이들이 거짓 선생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기탄없이 먹습니다. 염치도 없이 먹습니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먹습니다. 이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암초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성도들을 파멸하는 것입니다. 

The Death of Ananias, by Raphael

나는 어떻습니까? 함께 먹으면서 딴 마음을 먹고 식사 자리에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의 교제를 기회로 나의 유익을 챙기지는 않습니까? 암초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산산조각내지는 않습니까? 모든 식구가 맛있는 음식을 정답게 먹고 있는데 내가 엉뚱한 말을 합니다. 그 말이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형제자매의 귀를 의아하게 만듭니다. 소화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한 공동체 안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아간(Achan, 여호수아 7장)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Ananias and Sapphira, 행 5:1-11)처럼 공동체를 해치지 않습니까? 

그래서 노련한 선장은 암초를 피해서 갑니다. 멀리 돌아가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안전한 항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선장이 암초를 피해서 항로를 결정하고 명령을 내리는데 부하가 딴 마음을 먹고 반기를 든다면 암초를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물 밑에서 우리를 침몰시키려고 잠잠히(?) 기다리고 있는 암초입니다. 나는 암초입니까? 암초는 아니더라도 걸리적거리는 존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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