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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69)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유 12-13)

Jesus appears on the shore of Lake Tiberias by James Tissot

12.1.1. 여러분들은 어느 경우에 함께 식사합니까?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함께 식사를 즐기셨습니다. 그것도 사회의 약자들과 함께 말이죠. 그리고 잔치의 비유를 많이 들어서 하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과 식사를 하신 기사 중에 요한복음 마지막의 기사를 좋아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디베랴 호수에 오셨습니다. 실망하고 갈 곳을 모르는 제자들은 다시 물고기를 잡습니다.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지요. 그나마 물고기 잡는 기술이라도 있으니 그걸 다시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이들은 밤새 물고기를 잡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입니까?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사랑하고 의지했던 선생님이자 주님마저 없는 이 상황에서 그들은 한숨만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서 이렇게 저렇게 물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똑같은 질문 한 번 더… 이게 무슨 조화입니까?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이 잡았습니다. 

그제서야 요한(John)이 주님을 알아봅니다. 모두 육지에 올랐습니다. 보니 숯불이 있습니다. 숯불 위에 생선이 있습니다. 빵도 있습니다. 누가 마련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 밖에는 그 식사 자리를 마련할 분이 없습니다. 생각해보셨습니까? 그 못자국 난 손으로 숯을 피우십니다. 머리를 땅에 대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 불을 피우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시던 그 입으로 바람을 불어 불을 피우십니다. 불치의 병을 고치시던 그 입으로 불을 피우십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그 입으로 불을 피우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그 입으로 불을 피우십니다. 생선을 그 숯불 위에 올려 놓으십니다. 빵도 구워 내십니다. 어떻게 그 사이에 반죽까지 하셔서 빵을 만드셨을까요? (설마 돌로 빵을 만드셨을까요?) 

제자들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그 손에 못자국이 선명하게 있습니다. 그 빵을 굽는 손에는 못자국이 선명하게 있습니다. 아이들을 안고 쓰다듬어 주시던 그 손에는 못자국이 있습니다. 나병환자를 가만히 안아주시던 그 손에 못자국이 있습니다. 천지를 만드시고 별을 만드신 그 손에는 못자국이 있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그 손에는 못자국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는 구멍이 나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요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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