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2. 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거룩한 자입니다(벧전 2:9). 그런데도 나는 고라처럼 반역을 일으키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소위 말하는 자유 의지(free will)를 가지고 반역을 획책하지는 않습니까? 공동체의 결정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딴죽을 걸지는 않습니까? 물론 다수결의 원칙이 통하는 민주주의가 절대적인 선이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성경의 정치제도(?)는 민주주의가 아님을 가끔 느낍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독재를 두둔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현체제는 민주주의이고, 그 체제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나로서는 전체의 결정에 순종해야겠지요.
그리고 거창한 쿠데타가 아니더라도, 교회의 질서에 사사건건 반대를 하지는 않습니까? 특히 나보다 뛰어난 경건의 사람에게 반기를 들지는 않습니까?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쥐죽은 듯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집단이든지 질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폭의 세계에도 질서는 있습니다. 하물며 교회라는 집단이겠습니까? 교회의 질서를 해치면서까지 반골(反骨)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Judas Iscariot (right), retiring from the Last Supper, painting by Carl Bloch, late 19th century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반골 기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주신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할 가능성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창조주인 하나님을 배반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는 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나를 창조하셨다는 도박(?, 말투가 약간 거칠고 경박하지만, 적당한 낱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을 하신 것 같습니다. 저의 좁은 생각으로는... 그것은 은혜와 사랑, 그리고 용서와 용납이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도박입니다.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룟 유다(Judas Iscariot)의 배신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를 제자로 부르신 것처럼 말입니다. 솔직히 지금도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택하신 이유와 경위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잠시 멈추어서 생각해 봅니다… 저는 성경을 빨리 읽는 것에 찬성하는 편은 아닙니다. 시간은 좀, 아니 꽤 걸리지만 천천히 읽으며 생각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예배 시작할 때 암송하는 사도신경, 예배 마칠 때 암송하는 주기도문 등도 천천히 생각하며 암송하는 것에 한 표를 던집니다. 어쨌든, 자유 의지, 반골, 은혜와 사랑, 용서와 용납, 그리고 하나님의 도박 또는 내기(욥 1:6-12; 2:1-6)… 잠깐이라도 생각하고 넘어갑니다.
생각해 보셨습니까? 저는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자… 유다서로 다시 돌아갑니다. 거짓 선생들이 이렇습니다. 믿음이 없이 가인의 길에 행하고, 불의의 삯을 위하여 발람의 실수를 저지르고, 고라처럼 반역을 획책합니다. 계속해서 유다는 거짓 선생들이 어떤 인물인지 은유로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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