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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60)


10.2. 거짓 선생들이 멸망을 당하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편지를 읽으면, 제사드릴 때 잡는 소와 돼지가 생각납니다. 게다가 베드로 사도는 그 거짓 선생들을 짐승이라고 일컫습니다. 당연히 짐승에게는 이성이 없습니다. 본능만 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음행이 본능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런 음행, 또는 음란이 본능적인 것입니다. 

저는 저의 고민을 또 털어놓습니다. 하나님을 음란히 섬기는 것 말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말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고 하면서도, 한꺼풀 벗겨보면 나의 사리사욕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 그리고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죄라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는 복을 먼저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보다 창세기 1장이 먼저이겠지요. 인간의 죄로 인한 타락보다 먼저 주신 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 원죄(original sin)라는 말이 없답니다. 이 문제는 신학자에게 맡깁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이성이 필요합니다. 만약 인간에게 이성이 없다면, 바다의 물고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하늘의 새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이성을 이용해야 합니다. 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약 1:5-6a)

우리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압니다(열왕기상 3장). 그렇습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즉 무엇을 해야 할지, 언제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누구와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모든 사람에게 지혜를 후히 주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혜를 구하는 자를 꾸짖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 녀석아, 이것도 모르냐?” “한심하다, 한심해.” “내가 몇 번을 알려주었느냐?” 이렇게 꾸짖는 분이 아닙니다. NIV에는 ‘잘못을 찾지 않으시고(without finding fault)’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잘못, 단점, 흠을 찾아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단,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약 1:6a)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솔직히 저의 경우에는 의심(약 1:6)과 염려(빌 4:6) 없이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구한다고 하면서도 의심하거나 염려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사도 바울은 그런 저를 위해 한 가지 팁을 줍니다. 감사함으로(with thanksgiving) 구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평강이 찾아온다고 말입니다. 누구의 평강입니까? 상상하시겠습니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그 지존자의 그 평강이 어떤 일을 합니까? 나의 마음(heart)과 생각(mind)을 지킵니다. 당장 금덩어리가 내 눈 앞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은행에 수천억의 돈이 입금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내 눈 앞에 신데렐라나 백마를 탄 왕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램프 속의 지니(genie)가 아닙니다.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 어디서 지킨다고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in Christ Jesus)... 지키십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언제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누구와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비방과 본능을 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성과 지혜를 받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의심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구하면 주신다는 믿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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