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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59)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유 10)

10.1. 공동번역은 10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자들은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나 욕을 하고, 이성이 없는 짐승들처럼 무엇이든지 본능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바로 그 사실로 말미암아 멸망하고 맙니다. (유 10, 공동번역)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보다는 좀 더 쉽게 번역되었군요. 사람이란 참으로 이상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제 자신은 그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 즉 모르는 것이 있으면 힘써 배울 생각은 하지 않고 욕을 합니다(비방합니다). 혹은 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아예 귀를 닫고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이들에게는 이성(reason)이 없습니다. 이성이 없으니 배울 생각을 하지 않고, 더 나아가 알지 못하는 것을 욕합니다. 

저의 교회 목사님께서 ‘영적 게으름’이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 중의 하나인 이성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instinct)입니다. 그것도 짐승의 본능입니다. ‘짐승같은 놈’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겠지요. 더 나아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바로 그 짐승같은 본능이 멸망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 2:14)

거짓 선생들은 육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일들을 받지 못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를 보면 됩니다. 썩어질 육의 것을 생각할 때 성령의 일들을 받을 수 있을까요? 경건한 분들의 간증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폄하하는 일은 없습니까? 내가 영적인 일을 알지 못하니까 경건의 능력을 어리석게 보는 것 아닐까요? 이들은 영적인 문제를 알만한 능력이 없으므로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유다서의 짝이 될만한 베드로후서를 볼까요? 여러 번 인용한 구절입니다.

Luxuria (Lust), in The Seven Deadly Sins and the Last Four Things, by Hieronymus Bosch.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그들을 거슬려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 (벧후 2:10-12)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천사는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히 1:14).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습니다(히 2: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마저도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으니, 육신이라는 몸을 입고 있는 우리겠습니까? 우리도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한 존재이겠지요. 육신이라는 몸을 입고 있는 우리도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한 존재라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잠시 동안 천사들은 우리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말이지요. 그런 천사들도 거짓 선생들을 거슬려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비방과 판결을 하지 말자는 겁니다. 권면에서 끝냅시다. 경계를 넘지 맙시다. 그러기 위해선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합시다. 지혜를 구하되, 나의 동기를 먼저 살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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